근대 임상의학의 형성에 관한 두 가지 다른 역사적 해석 레포트
근대 임상의학의 형성에 관한 두 가지 다른 역사적 해석
푸코의 사상을 바탕으로 근대 임상의학의 형성에 관한 역사적 해석을 분석한 리포트입니다. 근대임상의학의형성에
1. 문제제기
2. 연구의 촛점과 범위
3. 프랑스 혁명사의 두 흐름
4. 주제에 대한 연구성과: 두 가지 다른 연구방법론
5. 푸코의 문제의식
6. 푸코의 방법론
7. 푸코에 대한 비판
8. 근대 임상의학의 태동: 행위와 구조
9. 푸코와 의학적 담론
10. 개념의 역사로서의 근대 서양의학
11. 서양의학에 있어서 근대성의 두 얼굴: 임상의학과 위생의학
1794년 이후
의회는 의료와 의학교육에서 ‘새로운 의학’의 근본원리들을 채택했다. 1794년 11월 27일 의회에 제출한 푸르크로와(Fourcroy)의 보고서는 프랑스 의학의 장래를 위해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Ecole de Sante에서 진료는 의학이론과 하나가 될 것이다... 적게 읽고 많이 보는 것, 그리고 실제로 많이 해보는 것은 위원회가 제안한 새로운 교수법의 기본이 될 것이다. 치료를 실제로 해 보는 것, 병상옆에서 관찰하는 것 등 (행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행해지지 않고 있는 모든 것들이 이제는 교육의 주요부분이 될 것이다... 내과학과 외과학은 같은 학문의 두 가지 분야이다. 그것들을 따로 공부한다는 것은 정신착란적인 상상을 위해 이론을 포기하거나 맹목적인 일상을 위해 실천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 둘을 다시 연합시켜 하나로 만드는 것은 그 둘이 서로를 가르쳐 그 진보를 더욱 심화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Ackerknecht. op.cit. 32에서 재인용
새로운 의학의 네가지 큰 원칙이 푸르크로와의 보고서에 명백히 정의되어 있다. (1) 혁명전의 임상 교육에 대한 변명과 전쟁시의 실제적인 의학교육에 대한 확실한 지지. 의학교육의 새 이론은 카바니, 피넬, 코르비사르 등이 주창한 임상적 접근법을 강조; (2) 병원이 내과의와 외과의들을 위한 적절한 훈련의 공간임을 인정; (3) 재정적으로 학생들로부터 독립된, 교육적 역할에만 전념할 수 있는 전임교수가 필요함을 강조; (4) 내과와 외과의 재결합.
표 2-4. Vess. op.cit. 170-171가 보여주듯이, 세 학교의 교수진을 분석해 보면 1795년 초에 프랑스에 출현하고 있었던 새로운 의학의 세계에 대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 세 학교는 각기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파리학교는 임상의학에 재능을 가진 민간인들이 운영하고 있었고, 몽펠리에는 이론의학으로 편향된 교수진에게로 되돌려졌다. 슈트라스부르는 실제적인 의학의 전통을 계속해 나갔다. 하지만 이 세 학교는 모두 내과와 외과에서 전통적인 것과 새로운 것을 섞어서 행하고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각 (지역)공동체가 각기 자기들의 빈자, 병자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것은, 오랫동안 프랑스에서 기본적인 원칙이었다. 교회, 자선기구들, 개인이 이에 기여했다. 개인구호와 지역 조직이 점증하는 가난과 건강보호의 문제를 적절히 해결하는 데 실패한 한가지 주요 요인은, 전염병을 다룰 의료인력의 부족뿐만 아니라 대중의 일상적인 의료의 요구를 해결해 줄 면허있는 내과의사, 외과의사, 산파들의 절대적 부족이었다. 또다른 요인은 교육과 진료에서의 프랑스 의학에 대한 신뢰가 결여된 점이었다.
세 개의 독립된 위원회- 건강, 교육, 공공복지 -가 이 세가지 당면과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의료는 이 세가지에 다 포함되어 있었다. 건강위원회는 의료기관들과 진료제도를 재조직, 교육위원회는 의학교육을 포함한 새로운 국가교육정책 수립, 공공복지위원회는 병자, 허약자, 노인극빈자들을 도와줄 국가차원의 정책을 개발하면서 분명히 현행 프랑스 의료기관과 업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비샤(Marie F. Xavier Bichat, 1771-1802)
표5. Williams. op.cit. 97가 보여주듯이 비샤는 생명의 구성요소를 두 가지 종류로 나누고 있다. 그의 생기론에 의하면 “생명은 죽음을 거부하는 모든 기능의 총체이다.” 그는 사람의 생명과정을 ‘동물적 생명(animal life)’과 ‘유기적 생명(organic life)’으로 나눈다. 전자는 습관에 의해 형성되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다. ‘이해’는 전자에 좌우되는데 반해 ‘정열’은 후자에 좌우된다. 사람의 몸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두 가지 다른 생명과정은 조직에 따라 변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전자는 후자에 앞서 생명과정을 멈추게 된다. 몽펠리에에서 결코 의학공부를 하지 않았던 비샤를 통해 역설적으로 18세기에 걸쳐 몽펠리에에서 발전해 온 생기론은 그 절정에 도달하게 되었다.
아커크네히트에 의하면, 비샤는 그의 감각적인 분석방법을 적용함으로써 신체의 기관을 표6. Ackerknecht. op.cit. 55이 보여주듯이 21개의 조직으로 나눌 수 있었던 것이다. 병리해부학은 비샤에게 있어서 미래의 과학이었다. “우리는 이제 병리해부학으로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할 시기에 접어들었다... 만일 어느 누구도 질병의 자리를 알지 못한다면 도대체 관찰을 해야 할 가치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여러분들은 20년동안 아침부터 저녁까지 병상옆에서 심장, 폐, 위의 질병에 대해 기록해왔지만 혼란만 느꼈을 것이다. 단지 증상만으로는 어떠한 일관된 현상도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주검을 열어보라. 환자에 대한 관찰만으로는 불가능했던 혼돈이 즉시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비샤가 프랑스 의학에 남긴 유산의 중심이다.
브루세이(F. Joseph Victor Broussais, 1772-1838)
표7과 표8은 혁명기에 프랑스 사람들이 체열(fever)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병원에 입원을 했었고 사망을 했는가를 보여준다. 이 당시만 하더러도 ‘체열’에 대한 ‘전형적인’ 접근이나 처치는 없었는데, 이는 그 원인이나 진단 양자에 대해 의사들간에 의견일치가 이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816년에 프랑스의 의학은 일대 지각변동을 일으킨다. 피넬(Pinel)이후로 파리의 의학사상을 지배해온 ‘본질적 체열(essential fever)’은 이제 브루세이에 의해 완전히 폐기된다. 브루세이는 피넬의 질병에 대한 분류학적 관점이 증상의 단순한 집합체를 실제적인 질병의 존재로 잘못 이해했다고 비판했다. 이후 브루세이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던가에 대해서는 프랑스의 의사들이 국외로 나간 수보다도 국내로 들어온 수가 엄청날 정도로 많았음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브루세이에 의하면, 기능의 혼돈을 이해하는 것이 병리학의 주요한 목표이었다. “의사들에게 있어서 질병의 본질은 기관의 생리적인 변화에 달려있다.” 그의 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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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제목 : 근대 임상의학의 형성에 관한 두 가지 다른 역사적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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