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의 사회생활과 문화 Up
삼국시대의 사회생활과 문화
평범한 농민의 자녀들은 대부분 성장하여 결혼을 하기 전까지 움집이나 초가에서 부모나 조부모와 한 방에서 살았다. 어느 정도 성장하여 노동 능력이...
평범한 농민의 자녀들은 대부분 성장하여 결혼을 하기 전까지 움집이나 초가에서 부모나 조부모와 한 방에서 살았다. 어느 정도 성장하여 노동 능력이 생겼을 경우 아이들은 부모를 도우면서 농사일을 익혀갔다. 아이들은 자라는 도중에 비슷한 나이 또래끼리 잘 어울렸다. 또래끼리 모여 사냥을 하기도 하고 무예를 닦기도 하였다. 이것을 사회 국가적 차원에서 지원하고 조직화 했던 것이 화랑도인 것이다.
고대 사회에도 결혼의 전단계로서 당사자간의 사랑에 의한 자유연애는 있었으나 일반적이지는 않았다. 대부분 결혼에서 부모나 집안의 의사가 우선시되었다.
15세가 지나면 성인(성인)으로 간주 되었다. 결혼 적령기는 15세에서 20세를 전후한 시기였다고 여겨진다. 그 당시에 자유연애가 있었을 정도로 일면 개방된 면도 없지 않았던 만큼 당사자들의 의사도 완전히 무시되는 상황 또한 아니었을 것이다. 고대 사회에도 근친혼(근친혼)을 피하고자 한 경향이 있었다. 동예(동예)라는 종족집단에서는 동성(동성)끼리는 결혼하지 않았다고 한다. 고구려 왕실도 왕실이 속한 계루부가 아닌 순노부와 대대로 결혼하였던 사실들을 보면 이같은 족외혼(족외혼)의 원칙은 비교적 잘 지켜졌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이와 반면에 근친혼을 경우도 보인다. 이는 특히 삼국시대 후반 신라 왕실이나 귀족간의 결혼에서 나타나고 있다. 왕실중에서 극히 일부 왕의 직계혈족만을 구분하여 성골(성골)이라 하였고 이들간에 결혼 관계를 갖게 되었다. 형이 죽은 뒤에 동생이 형수와 결혼을 하는 형태도 있었는데 이러한 풍속은 고구려 초기까지 시행되었다. 결혼식은 주로 신부집에서 행하여졌다. 고구려에서는 서옥이라는 집에서 첫날밤을 지낸후 그집에서 아이를 낳고 다 자란 뒤에야 함께 남편의 집으로 돌아 갔다고 한다. 동옥저(동옥저)라는 종족에서는 일종의 민며느리제가 있었다. 중국의 사서인 `주서`, `수서`, `신당서` 등의 고려(고구려)전에 의하면 고구려에서는 결혼에 패물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같이 결혼에서 재물이나 예물이 오가지 않는 상황은 신라나 백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결혼 후의 가정 생활은 우리가 접해볼 수도 있는 전통적인 농가의 모습과 비슷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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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분량 : 6 Page
파일종류 : HWP 파일
자료제목 : 삼국시대의 사회생활과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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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 삼국시대의,사회생활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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