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비교 - 흥선대원군 VS 민비 Down
정책비교 - 흥선대원군 VS 민비
흥성대원군과 명성황후의 대립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고, 흥성대군의 민비의 갈등 과정 및 정책을 비교 분석한 레포트입니다. 사용하시는 분들에게 유용하게 활용이 되길 바라며,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 정책비교-흥선대원군VS민비
1> 흥선대원군과 민비의 대립
2> 흥선 대원군
1. 생애 및 개혁 정치
2. 대원군의 쇄국정책의 배경
3. 서양열강의 공세
4. 쇄국정책의 말로
3> 민비
1. 출신과 간택
2. 대원군과의 갈등
3. 친청정책
4. 외교정책
5. 친러 정책과 을미사변
1873년 11월 5일 마침내 고종은 친정을 선포했다. 국왕 친정선포의 명령이 조보에 실려 전국 방방곡곡에로 퍼져나갔다. 창덕궁에서 운현궁으로 통하는 2개의 문, 임금 전용의 경근문과 대원군 전용의 공근문도 막아 버렸다. 대원군의 권력에는 국법의 근거가 없었다. 임금이 어리다는 이유로 집정이 되었으나 국법으로는 항상 임금이 최고 권력자로서 명령과 포고는 모두 임금의 이름으로 내려지고 있었다. 고종의 나이 21세 『훌륭히 어른이 되신 임금이 예지와 인덕으로 친정을 하시는 것이 지당하다』고 하니 대원군이 그것을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이에 대원군은 북문 밖 삼계동 산장에 나가 있다가 덕산군 가야산에 있는 부친 남연군 묘소에 성묘한 뒤 양주군 직곡 산장으로 은퇴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대원군이 53세, 명성황후가 22세였다.
2> 흥선 대원군
1. 생애 및 개혁 정치
조선 왕조 고종 때의 왕족, 정치가. 이름은 이하응이고, 고종의 아버지이며, 시호는 헌의이다. 철종이 아들이 없이 세상을 떠나게 되어 자기의 둘째 아들 명복(고종의 어릴 때 이름)이 왕위에 오르자, 실권을 잡고 대신 정치를 보살폈다. 대원군은 권력을 잡게 되자 안동 김씨의 세력을 몰아내고, 부패한 관리들을 처벌하였으며,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뽑아 썼다. 그리고 귀족과 평민을 가리지 않고 세금을 내게 하며, 사치와 낭비를 금하여 백성들의 생활 안정을 꾀하였다. 그의 과감한 개혁 정치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어 국민 생활의 안정에 이바지하기는 했다. 그러나 경복궁의 재건으로 재정을 무리하게 지출했고, 서원의 철폐로 유생들로부터 반발을 사기도 했다...
[문서정보]
문서분량 : 6 Page
파일종류 : HWP 파일
자료제목 : 정책비교 - 흥선대원군 VS 민비
파일이름 : 정책비교 - 흥선대원군 VS 민비.hwp
키워드 : 정책비교,흥선대원군,VS,민비
자료No(pk) : 16102942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