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근대에 있어서 민족운동의 전개 자료
조선 근대에 있어서 민족운동의 전개
개화, 동학, 위정척사 사상과 운동을 중심으로 본 조선 근대의 민족운동의 전개를 설명하고 있다. 조선근대에있어서민족운동의전개
1. 문제의 소재
2. 창생기
1) 척사
2) 동학
3) 개화
3. 결정적 대결의 시기 (1880~90년대)
1) 1880년대
(1) 개화
(2) 척사
(3) 동학
2) 1890년대
(1) 동학
(2) 개화
(3) 척사
4. 본격적 식민지화의 시기(20세기 초업)
1) 척사
2) 개화(애국계몽운동)
3) 동학
5. 몇 가지의 문제점
2. 창생기
개화, 동학, 척사사상은 무엇보다도 1860년대 무렵을 전후하여 형성되었다. 그것은 우연적인 일은 아니고 사회적 요인에 의한 것이다. 즉 조선에서도 아시아의 다른 나라의 경우와 같이. 봉건적 민족적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는 것이 최대의 이유이다. 이 사회적 상황에 조응하여 당시의 사상적 상황에도 현저한 변화가 보였는데,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봉건체제의 이데올로기적 지주였던 유교의 태내에서 실학과 이단 사상으로서 17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 발전하고, 당시의 주자학을 내부에서부터 신랄하게 비판하며 대두하여 온 것이다. 둘째, 세상을 바로 잡으려는 환상을 예언하는 유언비어가 유포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유언비어 자체가 사회적 불안의 산물이지만, 정상적인 사회에서는 황당무계한 것으로서 무시되는 것이다. 셋째, 기독교가 유입되어 당시의 사회적 정신적 불안에 편승하며 지배층 내부에까지 침식하고 사회문제로 되었던 것이다. 또한 19세기 중엽에는 대외적인 민족적 위기가 급속하게 현실문제로 나타나게 되고, 60년에 영불연합군이 북경에 침입한 것은 조선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일찍이 없었던 이러한 봉건적 민족적 위기에 직면하여 정부는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지만 지식인층에서는 그 극복책이 진지하게 모색되고 있었다. 그 구체적인 구현이 앞의 세 개의 사상의 형성이며 그것에 근거한 운동의 전개였다.
1) 척사
대내적으로 유교의 군신지대의와 대외적으로의 두 요소로 구성되어 있었다. 척사사상이 대두한 과정에서 특징적인 것은 이단을 배격하고 주자학 본래의 기본 선을 견지하여 봉건적인 정치체제의 건설을 도모하였던 것이다.
17세기 이후, 밖으로부터 기독교가 유입함과 동시에 대내적으로는 실학이 발생했다. 실학은 당시의 교조적인 전리설을 예리하게 비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사회개혁안을 제기하여 반봉건적인 색채를 점점 농후하게 띠고 이었다. 척사사상은 이와 같은 사상적 위기에 대처하여 성장해 온 것이다.
18세기의 척사운동이 대두하는 과정 그 자체는 대외적인 위기에서 촉발된 것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국내의 이단에 의한 봉건적 위기에 대처하는 데에 비중을 두고 있었다.
19세기 중엽의 영미의 침공사건을 계기로 하여 척사 파는 이단 배격에서 대외적인 양의로 공격의 화살을 본격적으로 이행하였다.
척사 파는 이 양이 책과 함께 체제입장에서 봉건적 위기의 해결을 도모하는 내수양민책을 강력하게 전개하였다
2)동 학
동학은 구미의 침략이 본격화하기 직전, 1860년대 민족적 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몰락양반인 최제우에 의해 창시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동학은 봉건적 위기뿐만 아니라 구미의 침략에 대한 불만의 산물이고 그것을 극복하는 것으로서 등장하였다.
동학은 인간은 누구라도 현세에 신과 같이 주체적으로 승화할 수 있다고 하면서 동학을 푸덕하고 사회를 개조하는 것을 이념으로 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봉건적인 신분적 차이는 없다. 오직 신앙의 정도만이 문제로 되었다. 민중을 구제하는 구체적 방법은 민중의 혁명적 수단이 아니고 종교적·평화적 수단이었다. 그러므로 이 기조는 반침략의 방법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이상현실을 지향하는 운동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직면해야 했던 권력과의 대결에 있어서도 동학상층부와 신도대중과의 대립 점으로 되기에 이르렀다.
동학이 급속하게 확산된 원인은 봉건적·민족적 위기 상황에 의한 사회적 정신적 불안의 고조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기성도덕과 다르고 환상적이며 동학이 반침략·반봉건의 민중의 의향을 반영하고 있었다는 데에서 찾아 볼 수 있겠다.
3)개 화
조선의 실학사상을 모태로 하여 서구의 근대사상을 적극적으로 섭취하고 새로운 근대적 사상으로서 개화사상이 형성되면서 그 실천으로서 개화운동이 전개되었다.
봉건적 신분제도를 비판하고 시민평등에 기초를 둔 사회적 분업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역관·의사 등의 중인인 오경석·유홍기 등의 역할이다. 오는 일·중의 역관으로서 여러 번 북경에 다녀왔고 중국을 경유한 서구근대사상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유와 함께 연구하여 개화 사상을 생성시켰다. 그들은 개화사상을 적용하여 일대혁신을 시도하고자 하였지만 중인이라는 낮은 신분이었기 때문에 많은 제약이 있었다.
실학파의 대가였던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의 영향이 컸다.
정약용·김정희 등의 직접·간접적인 영향에 의한 개화·개명 파의 배출이다.
이리하여 60년대에 개화사상이 싹트고 70년 후기에는 김옥균을 중심으로 하여 개화파가 형성되어 80년대 초엽부터 활발하게 움직이게 된다. 개화사상이 형성·발전하는 속에서 서양의 근대사상의 도입이 크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도입은 개국 이전에 오로지 중국을 매개로 하고 있었지만 76년 이후는 이본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것은 첫째로 일본의 위로부터의 근대적 개혁의 현실에 주목한 결과이다. 둘째는 수구파의 민씨 정권이 천국의 후원을 받고 봉건적인 반동정책을 강행하고 있는 것에 대한 하나의 대항수단으로서 일본을 중시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것은 또한 개화파가 일본에 이용당하는 요인이 되었고 후에 문제를 야기했다.
조선의 부르주아 민족운동은 동아시아의 중국·일본과 같이 제국주의시대의 이행 기에 더구나 구미의 침략에 대처하여 진행되었다. 그러나 조선의 부르주아 민족운동은 동아시아 가운데서도 늦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또한 구미뿐만 아니라 그것에 종속되고 있는 일·중 양국의 침략·간섭에 대처하여 전개되었다. 이 점에 조선 부르주아 민족운동의 특수성이 있었다
[문서정보]
문서분량 : 8 Page
파일종류 : HWP 파일
자료제목 : 조선 근대에 있어서 민족운동의 전개
파일이름 : 조선 근대에 있어서 민족운동의 전개.hwp
키워드 : 조선,근대에,있어서,민족운동의,전개
자료No(pk) : 16126768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