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최초의 여 황제 측천무후 Report
중국 최초의 여 황제 측천무후
지난학기에 서양고대사를 배우면서 내가 특별히 관심을가진 것이 이집트의 여왕과 카이사르 그리고 안토니우스의 이야기인데 이 세인물들의 정치적 관계나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사랑도 흥미로왔지만 고대시대에 어떻게 여자의 몸으로써 그같은 정치적인 야욕과 국민들의 지지를 얻었을까하는 것이었다. 중국최초의여황제측천
물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근대이전의 세계는 누가뭐래도 남자들만의 세계였다. 19세기 중반에 시작된 여성 참정권 운동에서 비롯된 페미니즘도 그것이 본격적으로 고개를 들기시작한 것은 미국을 중심으로한 20세기 중후반의 일이다. 요즘과 같이 여성의 평등이 법제도화 되지 않았던 당시로서 여성들의 힘또한 힘있는 남성들에게 신탁,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클레오파트라 또한 그러했다. 이것에 대해 다소 부정적인 입장도 있지만 대체적인 역사의 시각은 너그러운 태도로 대하면서 단지 그녀의 야욕이 너무 커서 로마가 흔들렸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 클레오파트라가 남성의 권위와 힘을 빌어서 그 위세를 떨쳤다면 지금얘기하고자는 당(唐)대의 측천무후 또한 비슷한 경우이나 주지할 사실은 당시 서양보다는 보다 남성권위적인 동양지역의 중추였던 당대에 여황제였다는 사실이다. 중국사에서 여성의 정치적 역할은 매주 제한됐다. 기껏해야 최고 권력자인 황제를 뒤에서 조정했던 것이 고작이다. 그러나 잠시나마 唐(당)제국의 맥을 끊고 스스로 황제에 오른 여성이 있었으니, 그녀가 바로 무칙천이었다. 먼저 황제에 등극하기까지 간단히 그 과정과 생애를 알아보고자 한다.
▶측천무후의 생애와 정치
무측천은 624년 山西(산서:병주(산동성 문주현) 출신)의 무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원래 목재상으로, 수말기에 李淵(이연), 즉 唐高祖(당고조)을 좇아 봉기하여 당의 건국에 참여했다. 그 공로로 당 건국 후에는 고위직(공부상서:지금의 건설부장관)을 차례로 역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벌을 중요시하는 당시 사회에서는 역시 한문(寒門, 보잘 것 없는 집안) 출신으로 인정되었다. 무측천은 14세 때 궁녀로 선발되어 입궁했다. 그녀의 본명은 明空으로 이 글자는 그녀 스스로가 만들었다. 태양을 가리키는「일」과 달을 지칭하는「월」그리고 하늘을 의미하는「공」세 글자가 합쳐 이루어진 것으로 하늘에 해와 달이 동시에 떠있어 비춘다는 뜻이다. 미랑의 성은 무(武), 이름은 조(照)였다.
정관말(669) 태종의 병이 날로 악화되어 가던 어느 날 황태자 이치는 태종이 와병중인 취미궁(翠微宮)으로 들라는 명령을 받았다. 취미궁으로 든 태자는 태종 곁에서 시중드는 한 궁녀의 모습에 눈길이 멎었다. 이 궁녀가 후의 측천무후로서 당시는 미랑이라 불리는 낮은 신분의 궁녀였으나 뛰어난 미모로 태종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문서정보]
문서분량 : 5 Page
파일종류 : HWP 파일
자료제목 : 중국 최초의 여 황제 측천무후
파일이름 : 중국 최초의 여 황제 측천무후.hwp
키워드 : 중국,최초의,여,황제,측천무후
자료No(pk) : 16123455
Comments